6-1 슬로우 패션 vs 패스트 패션, AI 시대에 왜 ‘느림’이 무기가 되는가
옷장은 가득한데, 입을 옷은 없는 시대
지금 패션 시장은 거의 게임처럼 돌아간다. 검색어와 해시태그, 장바구니와 클릭 수가 실시간으로 모이고, 이 데이터는 며칠 혹은 몇 주 안에 새 옷으로 변해 다시 화면에 올라온다. 초저가로 수천 가지를 쏟아내는 초(超)패스트 패션 플랫폼까지 합세하면서, 소비자는 언제든 손가락만 움직이면 새로운 옷을 살 수 있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옷장은 꽉 찼는데, 정작 입을 옷이 없다.” 세일 때 충동적으로 샀지만 한두 번밖에 안 입은 옷, 유행이 너무 빨리 지나가 그대로 구석에 밀려난 셔츠, 작년과 재작년의 ‘신상’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옷장. 각종 업계 보고서에서도, 전 세계에서 매년 생산되는 옷 중 상당수가 몇 번 입히지도 못한 채 재고와 폐기물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반복해서 지적되고 있다. 여기에 환경오염, 탄소배출, 폐섬유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초고속 패션을 둘러싼 비판과 규제 논의는 이미 유럽 등 여러 지역에서 현실이 됐다.
그런데 같은 시장 안에서 완전히 다른 흐름도 함께 커지고 있다. 새 옷을 덜 내놓고, 컬렉션 간 간격을 일부러 길게 가져가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소재와 패턴에 집중하는 브랜드들이다. 이들은 시즌마다 수백 개의 디자인을 쏟아내기보다, 소수의 아이템을 오래 끌고 가는 방식을 택한다. 생산 단가는 올라가고 속도는 느려지지만, 그 대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 “오래 남는 브랜드”라는 신뢰를 얻고 있다. 여러 시장조사에서도 이런 느린 방향을 지향하는 지속가능 패션 분야가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다.

앞에서 이미 한 브랜드 사례를 통해 “덜 팔겠다고 말하는 회사가 오히려 더 사랑받는” 장면을 확인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사례를 반복하기보다는, 왜 이런 흐름이 생겨났는지, 그리고 인공지능까지 등장한 지금 왜 ‘느림’이 오히려 전략이 되고 있는지를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AI가 좋아하는 ‘빠른 패션’과 사람이 고집하는 ‘느린 시간’
패스트 패션과 인공지능은 구조적으로 잘 맞는다. 데이터가 많고, 변수가 많고, 속도 경쟁이 치열한 산업일수록 AI의 장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클릭 수, 장바구니, 반품률, 검색어, 심지어 날씨 데이터까지 모으면 어떤 디자인을 어느 가격에 언제 출시해야 팔릴 가능성이 높은지, 어느 시점에 어느 정도 할인을 걸어야 재고를 최소화할 수 있는지 인공지능은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꽤 정확한 답을 제시할 수 있다. 이때 AI가 기본적으로 쓰는 언어는 명확하다. 재고 위험을 줄이고, 회전율을 높이고, 낭비를 줄이고, 마진을 안정시키는 방향이다. 요약하면 “덜 틀리고, 더 빨라지는 쪽”으로 계속 최적화한다.
반면 슬로우 패션이 던지는 질문은 애초에 다르다. 이 옷은 사람의 몸 위에서 몇 년이나 버틸 수 있을까, 한 시즌이 지나도 계속 손이 가는가, 해지거나 닳기 시작했을 때 버리는 대신 한 번쯤 수선해 입고 싶게 만들 수 있을까

. 즉, “얼마나 빨리 팔리는가”보다 “얼마나 오래 함께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도 인공지능이 그럴듯한 전략을 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생산량을 줄이고, 출시 주기를 늘리고, 내구성을 높이고, 수선·되팔기 프로그램을 붙이라”는 식의 답은 이미 여러 리포트와 분석 속에 등장한다. AI도 데이터를 학습한 이상, ‘느림이 장기적인 브랜드 가치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텍스트로 출력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하나 생긴다. 같은 문장을 말해도, AI가 거기까지 도달하는 경로와 사람이 그 선택을 하는 경로는 다르다. 인공지능의 목표는 결국 손실을 줄이고 효율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느리게 가라”는 결론이 나오는 순간에도 그 안쪽에서 돌아가는 계산은 여전히 “그 편이 장기적으로 이익이 더 크다”는 논리 위에 있다. 느림과 비효율은 어디까지나 더 큰 효율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된다.
반대로 슬로우 패션을 고집하는 브랜드의 출발점은 다르다. 이들은 일정 수준의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제품 수명을 늘리고 생산량을 줄이는 방향이 이 브랜드의 정체성과 맞는지를 먼저 고민한다. “당장의 매출보다 앞으로 10년 동안 유지할 신뢰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실제 재무제표와 조직 운영에 반영한다. 데이터는 참고자료일 뿐, 최종 결정을 대신 내려주지 않는다.
이 차이는 시간이 옷 위에 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느리게 만든 옷은 사람의 몸과 일상을 통과하면서 설득력을 쌓는다. 자주 입는 자리에 주름이 잡히고, 햇빛과 세탁을 반복하며 색이 서서히 옅어지고, 여러 번 기워낸 흔적이 옷 위에 층층이 남는다. 이 흔적은 단순한 마모가 아니라 함께 보낸 시간과 경험의 기록이 된다. 화면 속에서 ‘오래된 느낌’을 디자인으로 연출하는 것과 실제로 몇 해를 함께 보낸 옷이 주는 감각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기술적으로 잘 만든 이미지이고, 후자는 그 사람과 그 옷이 함께 통과한 시간이 만들어낸 관계에 가깝다.
인공지능은 전자 쪽에서는 매우 뛰어난 도구가 될 수 있다. 낡은 질감을 시뮬레이션하고 오래된 듯한 색감과 구김을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데에는 이미 상당한 성능을 보여준다. 하지만 후자는 결국 사람만이 만들 수 있다. 어떤 브랜드가 실제로 속도를 늦추고, 당장의 이익 일부를 포기하고, 오래 함께할 고객과의 관계에 투자하겠다고 결정하는 것, 그 결정과 태도만큼은 인공지능이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래서 AI는 브랜드를 설명하고 돕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어떤 손해까지 감수하고 어디까지 느려질 것인가”를 정하는 철학 그 자체가 되기는 어렵다.
느리게 만드는 브랜드가 택한 현실적인 선택들
슬로우 패션은 더 이상 개념적 구호가 아니다. 이미 여러 브랜드가 “느리게 만들겠다”는 선택을 실제 구조로 끌고 와서 시장에서 검증받고 있다. 프랑스 기반의 스니커즈 브랜드 베자(VEJA)를 보면 이 회사가 얼마나 비효율적인 길을 택했는지 금방 드러난다. 베자는 유기농 면, 재활용 플라스틱, 천연 고무 등을 사용하고 남미의 소규모 생산자들과 직접 거래하는 공급망을 만들어 왔다. 이렇게 하면 생산 비용이 올라가고 공장은 더 복잡해지고 변수도 많아진다. 효율만 따지면 굳이 선택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베자는 이 구조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재료를 어느 지역에서 가져오는지, 어떤 협동조합과 일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공개한다. 소비자는 “이 신발이 이 가격인 이유”를 이해하게 되고, 그 과정 자체에 가치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 브랜드가 여러 해에 걸쳐 쌓아 온 신뢰와 팬층은 결국 이런 느린 선택들 위에 세워진 결과다.
한국의 업사이클링 브랜드 래코드(RE;CODE)도 마찬가지다. 이 브랜드는 팔리지 못한 재고 의류와 산업용 원단, 군용 소재, 텐트와 낙하산 같은 것들을 해체해 다시 옷을 만든다. 같은 디자인을 몇 벌까지 찍어낼 수 있는지 애초에 명확하게 정하기 어렵다. 원단과 부자재가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손작업 비중이 커지고, 대량생산과 균일성을 전제로 하는 시스템에서는 예측이 잘 서지 않는 구조가 된다.
그런데 래코드는 이 구조를 “비효율”이라고 숨기지 않고 브랜드의 핵심으로 내세운다. 각 제품이 어떤 재고에서 출발했는지, 어떻게 해체되고 다시 만들어졌는지를 이야기로 풀어낸다. 어떤 프로젝트에서는 완성된 옷을 자연광에 오래 노출시켜 색이 서서히 바래도록 하고, 그 변화를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여기서 시간은 단순한 손상 요인이 아니라 제품을 완성해 가는 재료에 가깝다.
이 두 브랜드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느린 공급망, 손이 많이 가는 공정, 한 번에 많이 만들 수 없는 구조를 약점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왜 이런 방식을 고집하는지, 이 선택이 소비자와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꾸준히 설명한다. 인공지능도 이런 스토리를 텍스트와 이미지로 포장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실제 공장과 계약서, 재무제표 위에서 유지될지 말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여기서 슬로우 패션은 하나의 사실을 다시 확인시킨다. AI는 브랜드를 설명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어떤 손해를 감수하고 어디까지 느려질 것인지 정하는 철학은 결국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빠른 시대에 ‘느림’이 진짜 무기가 되는 순간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 슬로우 패션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착한 브랜드를 응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미 여러 데이터와 사례가 보여주듯, 느림은 점점 더 현실적인 비즈니스 전략의 언어가 되고 있다. 먼저 가격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초저가 패션이 엄청난 물류 시스템과 광고비를 바탕으로 끝없는 할인 경쟁을 벌일수록, 같은 방식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된다. 슬로우 패션 브랜드는 “오래 입을 수 있다”, “수선·되팔기 서비스를 전제로 설계했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워, 가격 안에 시간과 서비스의 가치를 함께 넣는다. 소비자는 점점 “얼마나 싸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함께할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브랜드를 비교하게 된다.
둘째, 규제와 리스크에 대한 방어력이 생긴다. 환경오염과 폐기물 문제를 둘러싼 규제가 강화되고, 초고속 패션을 겨냥한 광고 제한과 환경 부담금 논의가 이어질수록, 물량과 회전율에 의존하는 구조는 비용과 평판 리스크를 함께 떠안게 된다. 반대로 생산량을 조절하고 수선·재사용·업사이클링을 사업 구조 안에 포함시킨 브랜드는 규제가 강해질수록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느림은 신뢰를 쌓는 언어가 된다. 요즘 소비자는 “지속가능하다”, “친환경이다”라는 말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실제로 설득력을 갖는 것은 수선 서비스에 줄이 서 있는 모습, 되팔기 프로그램이 실제로 작동하는 흔적, 재고를 줄이고 생산량을 낮추겠다고 선언한 뒤 그것을 실제로 해냈다는 기록들이다. 이런 느린 약속이 유지되는 시간 자체가 브랜드 자산이 된다. 한 번 쌓인 신뢰는 유행이 한두 번 바뀐다고 쉽게 깨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느림은 인공지능이 가장 복제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AI는 앞으로도 트렌드를 더 빨리 읽고, 디자인을 더 정교하게 제안하고, 시장 보고서를 더 그럴듯하게 써 줄 것이다. 심지어 “이번 시즌에는 생산량을 줄이고, 내구성과 수선 서비스를 강화하라”는 조언까지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조언을 진짜로 받아들여 속도를 낮추고, 당장의 매출 일부를 포기하고, 대신 시간과 관계를 택하겠다고 결정하는 순간에는 여전히 사람이 서 있다.

결국 결론은 단순하다. 인공지능은 슬로우 패션식 답을 만들어내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답을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여러 옵션 중 하나”로 다룰지, “브랜드의 중심에 두고 끝까지 지켜야 할 기준”으로 삼을지는 전적으로 인간의 문제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속도를 올리고, 같은 알고리즘으로 전략을 뽑아 쓰는 시대일수록, 일부러 속도를 줄이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고, 비효율과 시간을 감수하는 선택이 오히려 강력한 차별점이 된다.
슬로우 패션은 바로 그 선택이 실제 매출과 팬층, 규제 대응력, 브랜드 신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실험이다. 그리고 이 실험은 패션에만 머물지 않는다. 앞으로 더 많은 산업에서 우리는 같은 질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빨라져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디까지 느려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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