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수제 맥주가 이기는 순간: AI 최적화 시대의 ‘맛있는 편향’
한 잔의 맥주, 왜 다 비슷해졌을까
맥주는 데이터로 설명하기 좋은 상품이다. 도수, 쓴맛, 색, 탄산감, 용량, 가격, 계절, 안주, 유통 채널까지 모두 숫자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대기업 맥주 회사들은 일찍부터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무난하게 마실 수 있는 한 잔”을 찾아왔다. 평균 취향을 향해 쓴맛과 도수를 조정하고, 제조·물류·마케팅까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여기에 인공지능이 더해지면서 이 흐름은 더 강해졌다. 편의점 POS, 마트 판매 로그, 배달앱 주문, SNS 언급 데이터를 AI가 한 번에 읽어내면 곧바로 이런 식의 답을 내놓는다. “이 도수, 이 가격, 이 쓴맛, 이 패키지가 가장 잘 팔릴 확률이 높다.” 이때 작동하는 것이 바로 ‘최적화 장벽(Optimization Barrier)’이다. 지금의 AI는 손실을 최소화하고 실패 확률을 줄이는 방향으로 학습되기 때문에, 점점 더 비슷한 “정답에 가까운 맛”을 추천하게 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누구의 맥주를 마셔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순간, 소비자는 “맛있긴 한데, 굳이 이 브랜드를 고를 이유”를 잃는다. 논리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레시피가 오히려 브랜드를 서로 구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역설이 여기서 생긴다. AI가 만든 전략은 허점이 없지만, 그 전략을 모두가 동시에 쓰기 시작하는 순간 시장은 회색으로 변한다. 이 책이 말하는 “AI가 만든 완벽한 획일화”가 맥주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수제 맥주의 출발선: 데이터 밖에서 시작된 맛
수제 맥주가 흥미로운 이유는, 이들이 처음부터 “평균을 맞추겠다”는 목표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시에라 네바다 브루잉은 좋은 사례다. 1980년대 초, 미국 시장이 가벼운 라거 일색이던 시절 이들은 훨씬 진하고 향과 쓴맛이 강한 Pale Ale을 내놓았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너무 쓰고 너무 진한” 맥주였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드디어 이런 맥주를 미국에서도 마실 수 있게 됐다”는 경험이 되었다.

브루클린 브루어리도 비슷하다. 이 브랜드는 뉴욕 브루클린이라는 오래된 공업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라벨 위에 올리고, “I ❤ NY”로 유명한 디자이너 밀턴 글레이저에게 지금의 로고를 의뢰했다. 녹색 원 안의 흰색 B자는 도시의 역사, 공장, 음악, 문화가 뒤섞인 정체성을 담은 아이콘이 되었고, 브루클린 브루어리는 이후 30여 개국에 수출되는 크래프트 브랜드로 성장했다.
이런 선택은 AI가 좋아하는 선택이 아니다. 평균적인 소비자에게는 너무 편향된 쓴맛, 도시의 무거운 이미지를 정면에 내세운 로고, 중립적이지 않은 스토리. 데이터만 보면 “위험한 변수”에 가깝다. 하지만 창업자들은 “그래도 이 맛과 이야기를 좋아할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는 믿음으로 시작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 ‘제로샷 저항(Zero-shot Resistance)’이다. AI는 과거에 존재했던 “저항의 패턴”은 복제할 수 있지만, 아직 데이터에 없는 새로운 거부, 새로운 편향을 먼저 선언하는 역할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수제 맥주의 첫 레시피는 바로 그 데이터 바깥에서 탄생했다.
제주맥주와 한국 크래프트의 실험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규제 완화와 함께 수제 맥주 시장이 열리기 시작했고, 2017년 400억 원대였던 시장은 2020년 1,000억 원을 넘어서며 빠르게 성장했다는 분석이 이어졌다. 전체 5조 원대 국내 맥주 시장에서 여전히 작은 비중이지만, “다 똑같다”던 시절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 한가운데에 제주맥주가 있다. 제주맥주는 제주에 양조장을 세우고 “제주 위트 에일”을 앞세워 편의점과 대형마트로 들어갔다. “국산 맥주는 무조건 라거”라는 공식 속에서, 향과 질감이 다른 에일을 대형 유통 채널에 깔아버린 셈이다. 수도권과 떨어진 생산지, 계절에 따라 출렁이는 수요, 물류 비용을 생각하면 효율적인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제주에서 만든, 제주를 떠올리게 하는 맥주”라는 설정을 고집했고, 이 선택은 결국 한국 소비자에게 “국산 수제 맥주”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서 중요한 또 하나의 개념이 등장한다. 바로 ‘체화된 시간 격차(Embodied Time Gap)’이다. AI에게 시간은 데이터가 업데이트되고 모델이 재학습되는 주기다. 하지만 맥주에게 시간은 발효와 숙성, 레시피를 거의 바꾸지 않고 유지해 온 세월, 한 도시와 함께 늙어온 공장과 사람들의 기억까지 포함한다. 시에라 네바다의 Pale Ale이 40년 가까이 같은 스타일을 유지하며 “클래식”이 된 과정, 브루클린 브루어리 로고가 도시 재생과 함께 상징이 된 과정, 제주맥주가 “제주에서 만든다”는 설정을 계속 붙잡고 가는 과정은 모두 이런 시간이 몸에 쌓인 결과다.
AI는 나중에 이 데이터를 모아서 “오래 유지되는 레시피가 신뢰를 만든다”, “지역성을 강조한 브랜드가 팬덤을 만든다”고 역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간 자체를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실제로 발효 탱크를 돌리면서 실패를 겪고, 공장을 고치고, 시즌마다 수요를 읽어가며 레시피를 조금씩 조정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과 장소의 몫이다. 바로 이 체화된 시간의 격차가, 대기업 라거와 수제 맥주를 가르는 중요한 경계선이 된다.
AI는 전략을 써 주지만, 태도까지 대신 정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수제 맥주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공지능은 이미 수제 맥주 회사에도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스타일이 잘 팔리는지, SNS에서는 어떤 향과 맛의 표현이 공감을 얻는지, 어떤 가격대가 구매 전환을 높이는지 분석해 준다. 글로벌 크래프트 시장 데이터를 바탕으로 새로운 레시피 조합도 제안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마지막으로 짚어야 할 것이 ‘진정성 인증 문제(Authentication Problem)’다. 소비자가 어떤 브랜드의 스토리를 믿고 따라가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인간의 시간과 수고, 실제 위험을 감수한 결과”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수제 맥주의 쓴맛, 지역성, 비효율적인 공정이 가치가 되는 것은, 그것이 단지 겉멋이 아니라 실제 생산과 경영의 선택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다.

AI에게 “쓴맛이 강한 IPA 레시피를 짜 달라”, “지역 이름을 붙이고 한정판으로 내 달라”고 부탁할 수는 있다. 결과물만 보면 꽤 그럴듯한 크래프트 맥주 전략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가 어느 날 알고 보니, 그 모든 “개성적인 시도”가 실제 현장에서는 거의 감수되지 않은 채, 화면 속에서만 설계된 컨셉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때부터 같은 레시피와 같은 문장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고, 브랜드는 신뢰를 잃는다.
결국 인공지능은 훌륭한 도구일 뿐, 브랜드의 까지 대신 결정해 줄 수는 없다. AI는 여러 전략을 펼쳐 보이며 “이런 길도 있다”고 말해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길들 중 하나를 고르고, “우리는 이 편을 택하겠다.
설령 속도가 느리고, 실패 위험이 크더라도”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수제 맥주의 역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효율과 최적화의 바깥에서, 자기만의 속도와 편향을 끝까지 감수하겠다는 선언이 브랜드의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모두가 같은 알고리즘으로 “완벽한 전략”을 뽑아 쓰는 시대일수록, 일부러 느리게 발효시키고, 과감하게 쓴맛을 올리고, 특정 지역의 이야기를 끝까지 붙잡고 있는 작은 양조장들이 더 눈에 띄기 시작한다. 수제 맥주가 대기업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더라도, 시장 안에 전혀 다른 종류의 승부를 만들어 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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