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아날로그가 디지털을 이기는 순간: AI 시대에 남는 것들
AI가 다 알려주는 시대, 그런데 왜 사람들은 다시 아날로그를 찾을까
지금은 검색창에 몇 글자만 넣어도, 인공지능이 “이렇게 하면 잘 팔린다”는 전략을 쏟아내는 시대다. 음악 비즈니스를 묻으면 스트리밍 구독, 추천 알고리즘, 플레이리스트 전략을 말해 주고, 사진 비즈니스를 묻으면 카메라 앱, 필터, 클라우드 백업을 이야기한다. 서점을 묻으면 온라인 서점, 전자책, 구독 모델이 당연한 답처럼 따라 나온다.

그런데 숫자를 들여다보면 이상한 풍경이 보인다. CD가 사라진 줄 알았는데, LP(바이닐) 판매는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모두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시대에, 후지필름 인스탁스(즉석카메라)는 네 해 연속 사상 최대 매출을 올린다. 온라인 서점이 일상이 되었는데, 도쿄 다이칸야마의 츠타야 T-Site는 “굳이 가서 머물고 싶은 서점”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간다.
이 사례들은 오늘날의 인공지능도 충분히 전략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다. “아날로그 감성을 활용하라”, “물성을 가진 경험을 제공하라”, “체류형 서점을 만들라”는 문장은 AI도 쉽게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 글이 말하고 싶은 핵심은 따로 있다. 같은 문장을 말할 수 있어도, 그 선택을 맨 처음 감수한 존재는 언제나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LP 리바이벌: 플레이리스트를 거부한 한 장의 시간
음악 산업에서 디지털 전환은 가장 완벽하게 끝난 것처럼 보였다. MP3, 스트리밍, 정액제 요금제. 재생 버튼 하나로 전 세계 음원을 무제한으로 듣는 세상에서 LP는 오래전 유물이 되어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LP가 다시 성장하고 있고, 일부 국가에서는 CD 판매량을 넘어서는 상황까지 왔다.
인공지능 입장에서는 이 흐름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Z세대는 레트로를 좋아한다. 턴테이블과 컬러 바이닐로 ‘필 느낌’을 팔아라. 한정판으로 희소성을 만들고, LP바와 카페로 체험을 확장하라.” 데이터만 놓고 보면 충분히 그럴듯한 설명이다.
그러나 LP의 힘은 전략 문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스트리밍은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스킵하는 소비를 만든다. 반면 LP는 커버를 열고, 판을 꺼내어 턴테이블에 올리고, 바늘을 조심스럽게 내려야 소리가 난다. 한 면이 끝나야 뒤집을 수 있고, 곡을 건너뛰는 것조차 번거롭다. 이 모든 절차가 “한 장의 앨범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만들어 낸다.
인공지능은 나중에 이 현상을 분석해서 “몰입형 청취 경험이 팬덤을 만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LP를 끝까지 지킨 레이블과 가게들은 그런 데이터를 보지 못한 시절부터, 비효율과 손해를 감수하며 턴테이블을 돌리고 있었다. AI는 이유를 설명하는 도구일 수 있지만, 처음 그 길을 가겠다고 말해 준 주체는 아니다.
인스탁스: 무한 사진 시대에 ‘지워지지 않는 한 장’을 파는 법
사진은 더 극적이다. 스마트폰과 클라우드, 카메라 앱 덕분에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장씩 사진을 찍고 지운다. “안 나오면 다시 찍지 뭐”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 결과 사진의 양은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각 사진이 갖는 의미는 점점 가벼워졌다.
그런데 후지필름 인스탁스는 이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필름은 한 카트리지에 정해진 장수만 들어 있고, 한 장을 찍을 때마다 필름 값이 빠져나간다. 초점이 나가도, 표정이 망가져도, 그 한 장은 다시 찍을 수 없다. 이 작은 리스크 때문에 사람들은 인스탁스를 들고 있을 때 더 오래 구도를 맞추고, 더 진지하게 타이밍을 잡고, 찍힌 사진을 더 소중히 다룬다.

인공지능은 이 현상도 쉽게 요약할 수 있다. “실물 사진은 기억의 밀도를 높인다. 인스탁스를 활용한 굿즈와 행사 전략을 만들라. Z세대를 겨냥한 폴라로이드 감성 콘텐츠를 기획하라.” 하지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스마트폰 앱에서 필터를 씌운 “필름 감성 사진”과, 손에 남는 즉석필름 사진은 다르다는 것을.
결과물만 보면 비슷해 보여도, 출발과 의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스탁스 한 장 뒤에는 “언제, 누구와, 왜 이 한 장을 찍었는지”가 그대로 붙어 있다. 그 이야기는 데이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남는다.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패턴을 정리해 전략으로 번역하는 것까지다. 그 전략을 몸으로 살아내는 주체는 여전히 인간이다.
다이칸야마 츠타야: 책이 아니라 ‘머무는 시간’을 파는 서점
서점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서점과 전자책의 등장은 “굳이 오프라인 서점에 갈 이유”를 약하게 만들었다. 검색, 결제, 배송까지 몇 번의 클릭이면 끝나는 세상에서, 종이책만 파는 동네 서점은 가장 먼저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다이칸야마 츠타야 T-Site는 이 상식을 거꾸로 뒤집은 공간이다. 이곳은 책·잡지·음악·영화·문구·카페·라운지가 촘촘하게 얽혀 있고, 사람들은 책을 사지 않아도 하루 종일 머문다. 아침에는 커피와 함께 신문을 보고, 낮에는 라운지에서 노트북을 열어 일하고, 저녁에는 음악 코너에서 LP와 플레이리스트를 함께 고른다. 이곳이 파는 것은 “책”이 아니라 “머무르는 경험”에 가깝다.

인공지능도 이런 공간을 보고 나면 비슷한 조언을 할 수 있다. “체류 시간을 늘리는 공간을 설계하라. 북카페와 라운지를 붙여라. 도심의 라이프스타일 허브가 되라.” 하지만 이 모델은 숫자만 보면 비효율 투성이에 가깝다. 재고 회전율은 떨어지고, 임대료는 비싸고, 손님은 자주 와도 매번 책을 사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래도 우리는 이런 서점을 하고 싶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공간과 동네의 시간을 함께 쌓아 왔다. 이 시간은 데이터로 요약할 수 있지만, 계산으로 대신 살 수는 없다. 다시 한 번 똑같은 결론에 닿는다. AI는 설계도를 설명해 줄 수 있지만, 그 공간을 매일 열고 닫는 손과 몸은 인간의 몫이다.
AI는 도구이고, 처음 방향을 정하는 태도는 사람에게 있다
LP, 인스탁스, 츠타야 T-Site. 이 세 가지 아날로그 사례는 모두 인공지능이 오늘이라도 전략 보고서로 정리해 줄 수 있는 것들이다. “아날로그 물성, 레트로 감성, 체류형 공간”이라는 키워드는 이미 수많은 트렌드 기사와 마케팅 자료에 등장한다. 그래서 이제 중요한 질문은 “AI가 이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느냐”가 아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아무 데이터도 보장해 주지 않을 때, 누가 먼저 이 방향을 선택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리스크를 감수하겠다고 말한 존재가 누구인가”다. 인공지능은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후행적인 설명을 아주 잘해 준다. 하지만 데이터가 쌓이기 전, 누군가 LP를 다시 찍고, 즉석필름을 다시 만들고, 느리게 머무는 서점을 열겠다고 결정했던 그 순간에는, 어떤 알고리즘도 대신 서 주지 않았다.

결국 AI는 점점 더 똑똑한 도구가 될 것이다. 전략을 정리하고, 리스크를 계산하고, 과거 사례를 찾아 비교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브랜드의 방향, “이 편을 택하겠다”는 선언, 그리고 그 선언에 따라 시간을 쌓는 일은 도구 바깥에서 일어난다. 아날로그가 디지털을 이기는 순간은 기술의 승부가 아니라 태도의 차이에서 출발한다.

모두가 같은 알고리즘을 쓰는 시대일수록, 일부러 느린 길을 택하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아날로그적인 시간을 설계하는 브랜드는 더 눈에 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그 길의 첫 발은 여전히 인간이 내딛는다. 그리고 바로 그 첫 발에서, 진짜 브랜딩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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