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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행진 (Sheep Parade)/제6장: 시간의 재발견

평생 A/S라는 역발상: 고장 나야 돈 버는 시대의 반전 전략

6-4 평생 A/S라는 역발상: 고장 나야 돈 버는 시대의 반전 전략

AI가 설계한 세계 vs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브랜드

지금 기업의 회의실에서 인공지능은 이미 중요한 자리로 들어와 있다. 어떤 가격대, 어떤 기능 조합이 가장 잘 팔리는지, 고객이 몇 년 차에 불만을 느끼는지, 언제 “이제 바꿀 때가 됐지”라는 생각을 하는지까지 데이터로 보여준다. 교체 주기, 업그레이드 타이밍, 적정 내구성, 적당한 불편함. 이 모든 것이 손실을 최소화하고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식 안에서 정리된다는 점에서 AI는 매우 유능한 조력자다. 필요하다면 비움이나 모자람, 불균형조차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설계해 줄 수 있다.

AI 회의실 한가운데에서 다른 질문을 적는 사람

 

하지만 이 글이 집중하고 싶은 지점은 따로 있다. AI가 어떤 전략을 말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 전략이 어디에서 출발했는가라는 질문이다. 제품은 언젠가 고장 나야 다시 팔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최적화된 세계와, “고장 나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선언으로 출발한 세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앞의 세계는 수식과 알고리즘에서, 뒤의 세계는 태도와 철학에서 시작된다. AI도 비움과 모자람, 불균형을 일부러 만들어내고 그것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방향으로 살겠다”고 처음 말하는 행위 자체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양말·가전·여행가방이 보여준 ‘평생 보증’의 진짜 힘

미국 버몬트주의 양말 브랜드 Darn Tough Vermont는 양말이라는 가장 빨리 닳는 제품에 평생 보증을 걸었다. 구멍이 나면 언제든 보내라고 말했고, 실제로 닳아 돌아온 양말을 아무 조건 없이 새 제품으로 교체해 주는 시스템을 지금까지 유지해 왔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말이 되지 않는 장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 약속은 브랜드의 정체성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양말을 한 번 신어 보고 나면 다른 양말을 쉽게 사지 않게 되었고, 선물용·여행용·산행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자발적 전도자가 되었다. 평생 A/S가 단기 손해를 부르는 비용이 아니라, 장기 충성도를 만들어 내는 투자로 작동한 셈이다.

닳았지만 버려지지 않은 양말 한 켤레

 

독일 프리미엄 가전 브랜드 밀레(Miele)도 비슷한 방향을 택했다. 이 회사는 세탁기와 식기세척기 등을 개발할 때 평균 20년 사용을 상정한 내구성 테스트를 진행해 왔다고 밝힌다. 생산이 끝난 뒤에도 핵심 부품을 장기간 보유하며 수리를 지원하는 정책을 꾸준히 유지한다. “10년 넘게 써도 버티는 기계”라는 이미지는 밀레의 브랜드 스토리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 되었다. 이는 단지 제품을 튼튼하게 만드는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오래 쓰는 삶을 전제로 제품을 만든다”라는 태도의 결과이다.

여행 가방 브랜드 Briggs & Riley는 “Simple as That”이라는 이름의 평생 보증으로 유명하다. 이 브랜드는 가방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손상이라면 원인과 상관없이 수리를 약속한다. 항공사 파손이든, 고객의 부주의든, 일상적인 마모든, 가능한 한 살려서 다시 쓰게 돕겠다는 뜻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이 약속은 “이 가방과 함께 여행의 시간을 마음 편히 쌓을 수 있다”는 신뢰로 읽힌다. 제품 하나를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까지 함께 사는 느낌이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사례는 모두 “평생 A/S”라는 문장을 공유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공통점은 따로 있다. 이 회사들은 처음부터 교체 주기가 아니라 관계의 길이를 기준으로 사업을 설계했다는 점이다. 오래 쓸 수 있도록 설계하고, 수리 가능한 구조를 만들고, 부품과 기술자를 장기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인공지능은 이 선택의 결과를 나중에 분석하고 정리해 줄 수 있다. 그렇지만 “한 번 팔고 끝내지 않겠다”는 최초의 결심은 데이터가 아니라 사람의 의지에서 나왔다.

AI도 평생 A/S를 추천할 수 있다, 그러나 출발점이 다르다

오늘날 생성형 AI는 상당히 세련된 전략 문장을 어렵지 않게 만들어 낸다. “고객 생애가치를 높이기 위해 평생 보증 정책을 도입하라”, “제품을 한 번 파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판매하라”, “수리 가능성을 높이는 브랜드가 규제 변화와 지속가능성 흐름 속에서 우위를 갖는다”는 식의 조언은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실제로 Darn Tough, 밀레, Briggs & Riley처럼 오래 쓰는 제품을 내세운 브랜드들의 데이터를 학습한 AI라면, 이들의 전략을 압축한 보고서를 꽤 그럴듯하게 써 줄 것이다.

세탁기와 함께 나이 든 집안의 시간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AI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누군가가 이미 그 길을 먼저 걸었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쌓이기 전, 평생 보증을 걸고, 20년을 상정해 설계를 하고, 항공사 파손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할 때에는 어떤 알고리즘도 “이 길이 안전하다”고 보장해 주지 않았다. 재무 모델로만 보면 위험해 보이는 선택이었고, 단기 손익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브랜드들은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하겠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비효율과 불균형을 감수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AI에 의존한 전략과 인간이 선택한 전략의 본질적인 차이가 생긴다. AI도 비움과 모자람, 불균형을 전략으로 제안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비움과 불균형을 실제로 감내하겠다고 말하는 존재, 즉 “우리는 수익의 일부를 비워두고 신뢰를 쌓겠다”고 선언하는 주체는 사람이다. 평생 A/S라는 역발상은 이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겉으로는 비슷한 전략 문장처럼 보이지만, 한쪽은 과거 데이터를 따라간 결과이고, 다른 한쪽은 아직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을 때 던진 선택이다.

버리는 시대에서 고쳐 쓰는 시대로: 브랜드가 던져야 할 질문

스마트폰, 가전, 패션, 가구까지 많은 산업의 기본 전제는 오랫동안 비슷했다. “언젠가는 버려질 것이다.” 그 전제를 기반으로 교체 주기를 설계하고, 신제품 출시 캘린더를 맞추고, 마케팅과 프로모션을 짠다. 인공지능은 이 세계를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다. 고객이 지겨움을 느끼는 타이밍, 고장 확률이 높아지는 지점, 교체를 유도할 수 있는 메시지 조합을 정확하게 계산해 준다. 효율이라는 관점만 놓고 보면 AI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완벽한 도구에 가깝다.

공항 한켠, 다시 떠날 수 있게 고쳐주는 가방 수술실

 

반대로, 평생 A/S를 진심으로 내건 브랜드는 질문을 바꾼다. “우리는 고객과 몇 년짜리 관계를 맺으려 하는가.” “고장이 나야만 돈을 버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이 질문에서 출발하면 설계와 조직, 재무와 마케팅까지 함께 달라진다. 수리 가능한 구조를 만들고, 부품을 오래 보유하고, 수리 기술자를 회사의 중요한 자산으로 대우해야 한다. 단기 매출을 위해 교체를 유도하는 대신, 오래 쓰는 경험을 브랜드의 핵심 가치로 내세우게 된다.

버리는 길과 고쳐 쓰는 길, 갈라지는 갈림길

AI 시대라고 해서 이런 질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같은 도구를 쓰고, 비슷한 최적화 모델을 돌리는 시대에는 “우리는 어디까지 감수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브랜드의 얼굴을 결정한다. AI의 조언을 참고하면서도, 그 조언에 전적으로 기대지 않는 방식. 비움과 모자람, 불균형과 비효율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태도. 평생 A/S라는 역발상은 그런 태도가 현실의 사업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결국 핵심은 이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AI도 비움과 모자람, 불균형을 전략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방향을 처음 감수하겠다고 말하는 의도와 태도는 사람만이 가진 영역이다. 버리는 시대에서 고쳐 쓰는 시대로 넘어가는 일은, 기술이 먼저가 아니라 태도가 먼저인 변화다. 그리고 그 태도는, 숫자로는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 브랜드의 품격을 만든다.